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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어떤 정권도 양심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 -32회 민족민주열사희생자 범국민추모제 참가기

열사추모 2023. 8. 10. 16:43

[기고] 열사추모제 참가 후기

 

32회 ‘민족민주열사 희생자 범국민추모제’를 다녀오다

- 어떤 정권도 양심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 -

 

허영무(남부대학교 교수)

 

1. 김혜순 회장님과의 만남

 

우연한 기회에 우연한 장소에서 양심수후원회 김혜순 회장님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그 분의 초대로 지난 6월 10일에 32회 민족민주열사희생자 범국민추모제를 다녀왔다. 한편으로 영광이고, 다른 한편으로 부끄러웠다. 640위의 열사님들 가운데 나의 은사님이신 이두화 열사님의 영정을 직접 봉안해 드린 것은 큰 영광이었다. 하지만, 이제야 양심수후원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그 날 추모제 행사에서 한평생 조국통일을 위해 헌신하신 박희성 선생님과 양희철 선생님, 그리고 추모제 행사와 양심수후원회에 대하여 자상하게 안내해 주신 박재현 국장님을 뵙게 된 것은 내 평생의 가장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음지에서 우리 사회의 약자들, 그리고 억울하게 소외된 자들을 위해 일하시는 따뜻한 분들을 뵙게 되니 고개가 저절로 수그려진다. 

 

그보다 며칠 앞선 현충일에 한반도평화경제협의회가 추진한 DMZ통일기행 프로그램에서 김진향 개성공단이사장님의 인솔로 민통선 일대를 약 40명의 참가자들과 함께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뜻밖에 김혜순 회장님을 알게 되었다. 반갑게 인사한 후 혹시 은사님이신 이두화 열사님의 소식을 아는지 물었다. 김 회장님은 이두화 열사님이 작년(2022)에 작고한 사실과 열사님의 활동이력에 대하여도 소상히 알고 계셨다. 순간 깜짝 놀랐다. 무려 50년 전에 나의 모교에서 역사를 가르치시던 이두화 선생님에 대해서 이렇게 자세히 알고 계시다니 놀라웠다. 

2. 이두화 열사님은 나의 중학교 은사님

 

내 기억으로 이두화 선생님께서는 곡성군에 있는 옥산중학교와 옥과고등학교에서 약 5~6년 정도 역사와 사회과목을 가르치셨던 것으로 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우암학원이라는 같은 재단에 속하는 사립학교였고, 같은 캠퍼스 안에 있었다. 나는 이두화 열사님으로부터 중학교 2~3학년 무렵인 1973년부터 1974년까지 2년간 역사와 사회과목을 배웠다. 선생님은 평양사투리가 아닌 거의 서울 말씨를 쓰셨다. 당신의 지나온 과거에 대하여 일체의 말씀을 하지 않으셨기에 이런 쓰라린 아픔을 간직한 사연을 전혀 알지 못하였다. 당시에 초등학교 다니던 철이라는 아들을 혼자서 기르시던 모습도 떠오른다.

 

어느덧 제자인 나도 70을 코앞에 두고 있다. 그래서일까 뜬금없이 작년 연말쯤에 이두화 선생님을 한번 찾아뵙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인터넷을 뒤지면 선생님의 근황이라도 알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여기저기 들락거렸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한겨레신문 등 여러 매체의 보도를 보니 이두화 선생님께서는 북으로 2차 송환을 기다리시다가 불과 몇 달 전에 끝내 소천하셨다는 것 아닌가. 몇 달만이라도 좀 일찍 찾아보았더라면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가슴 한 켠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너무 늦었다. 후회한들 어쩌랴. 그나마 김혜순 회장님 덕분에 이두화 열사님의 영정을 봉안해드리고 나니 큰 위로가 되었다. 하늘에 계신 이두화 열사님, 어리석은 우리 민족들의 화해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3. 북에서 오신 줄 전혀 몰랐다

 

이제야 알게 된 일이지만, 열사님께서는 김일성대학 3학년 재학 중인 한국전쟁 직후에 북이 남을 점령했을 당시에 문화선전대원으로 선발되어 남으로 내려오셨다고 한다. 그러나 무안과 영암 월출산 등에서 활동하시다가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가 막히자 광양 백운산,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들과 합류하였고, 그들이 세운 도당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셨다. 다행히 무기를 들지 않았고, 전향을 전제로 풀려난 후 나의 모교까지 오셔서 역사를 가르치신 것으로 보인다. 

 

이두화 은사님은 항상 웃으시며, 자상하시고 아이들을 사랑으로 대하셨다. 자그마한 체구이지만 인자한 미소와 두꺼운 안경너머로 묻어나는 잔잔한 인품이 매력적이셨다. 어쩌다 전라도 산골마을까지 흘러오셨는지, 얼마나 할 얘기가 많으셨는지. 얼마나 억울하고 한 맺힌 사연이 많으셨는지. 엄혹한 시절이기에 어떠한 말도 사연도 얘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학교에서 은사님에 대한 그 어떠한 사연도 듣지 못하였다. 국가보안법 때문에 벙어리 같은 세월을 사셨으리라. 22살 쯤 남으로 오셨고, 내가 선생님으로부터 역사공부를 배울 무렵에는 아마 선생님의 나이도 마흔 후반쯤 되셨을 것이다. 반인륜적인 국가보안법은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기본권을 침해하는 악법 중의 악법으로서 마땅히 불법이고 위헌적인 것이다. 인류 역사와 동서고금을 통해 보더라도 이런 악법은 그 유래가 없다. 우리는 이러한 악법에 대하여 시민불복종, 비판정신, 저항권의 행사 등으로 권력과 맞서 싸워야 한다. 

 

4. 더 이상 정부는 믿을 수 없다. 이제 시민이 나서자!

 

우리 정부는 분단의 장벽을 제거할 의욕도 능력도 없어 보인다. 분단 이후 70년 동안 우리 정부는 스스로가 무능함을 실증적으로 잘 증명해주고 있다. 그저 미국에 빌붙어 굴종하면서 같은 민족을 향해 서로 패악질만 저지르고 있다. 모든 분단의 책임을 북에 전가하면 그만이다. 분단의 절반의 책임은 최소한 남측에게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 먼저다. 이런 비극을 후손들에게 물려주는데 어떠한 반성도 성찰도 없다, 정권이 바뀌어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신뢰할 수 없다. 70년이 넘도록 분단을 해결하지 못하는 나라는 지구상에 어디에도 없다. 무슨 이유로 같은 핏줄을 갈라놓고 만나지 못하게 하는가. 정권의 담당자들은 목숨을 던져서라도 그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관련 국가들을 설득하여 분단을 해결해내야 한다. 자신이 없으면 정권을 내놓으라. 이제는 시민이 나서야 한다. 비극은 우리 세대에 끝을 내자. 끝으로, 조국 통일을 위해 싸우다 지쳐 하늘로 가신 이두화 열사님의 평안한 안식을 위해 기도하며 글을 마친다. 모든 양심수들이 하루 빨리 고향땅을 밟을 수 있도록 모든 수단을 아끼지 말아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