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기념)단체연대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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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 이야기 ⑦

열사추모 2024. 8. 7. 16:22

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 이야기 ⑦

-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 역할을 한 박종철 열사의 묘


김학규 추모연대 교육위원장

 

뒤늦게 조성된 박종철 열사의 무덤

우리 사회 민주화의 결정적 분수령이 되었던 1987년의 6월 민주항쟁은 전두환 군사정권을 완전히 몰아내는 결정적 승리로까지 나아가지는 못했지만, 대통령 직선제와 지방자치제 도입 등민주화의 초석을 다진 역사적 사건이었다. 

지난 2017년에 개봉되어 선풍적 인기를 끈 영화 <1987>에서도 등장하듯이 남영동대공분실에 연행되어 수배 중인 한 선배의 거처를 대라며 물고문 등을 자행하던 전두환 군사정권의 고문경관에 맞서다 스러져간 서울대생 박종철의 의로운 죽음은 온 국민에 충격과 분노를 자아냄으로써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 역할을 했다.

그런 박종철 열사의 무덤이 마석모란공원에 조성된 때는 49재 2주년을 맞는 1989년 3월 3일이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한양대병원에서 부검을 마친 박종철 열사의 유해는 사망 이틀 후인 1987년 1월 16일 오전 벽제 화장터에서 화장되어 한강의 한 지류인 샛강에 이미 뿌려졌다. 박종철 열사의 집안이 불교 집안인 탓도 있었지만, 전두환 군사정권의 압력에 어쩌지 못한 측면이 컸다. 이때 아버지 박정기가 남긴 “철아, 잘 가그래이…. 아부지는 할 말이 없대이.”라는 말은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민주열사박종철초혼장장례위원회가 만들어진 것은 49재 2주년을 얼마 남기지 않은 때였다. 아들의 묘조차 만들어주지 못한 것에 대한 한이 컸던 아버지 박정기는 지난 2년 아들의 장례를 치르는 일을 숙원으로 삼았기에 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의 설립에 맞춰 아들의 초혼장을 제안했던 것이다. ‘박종철 초혼장’은 화장된 뒤 한강의 한 샛강에 뿌려진 박종철의 혼을 불러 장례를 치르고 묘를 만드는 의식이었다.

민주열사박종철초혼장장례위원회 위원장은 초대 기념사업회 회장이기도 한 백기완이었는데, 백기완이 전날 집회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서 문익환 목사가 위원장을 맡아 진행했다. 박종철 열사의 초혼제는 1989년 3월 3일 서울대 아크로폴리스에서 진행되었고, 남영동대공분실 앞에서 하려던 노제는 경찰의 철통같은 방해망을 뚫을 수 없어 봉천사거리에서 거행한 후 뒤늦게 장지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마석모란공원에는 전날 열사의 뼛가루가 뿌려졌던 한강의 한 샛강에서 가져온 흙을 관에 넣어 묻은 허묘가 조성되었다. 

 



신의(信義)를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히 여긴 청년 박종철 

박종철 열사가 자신의 하숙방에서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임의동행 형식으로 연행된 것은 1987년 1월 14일 새벽이었다.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으로 수배 중인 한 선배(박종운)를 체포하기 위한 참고인 신분이었음에도 전두환 군사정권은 박종철에게 끔찍한 물고문과 폭행 등을 자행하면서 수배자의 거처를 캐물었다. 

사실 선배 박종운은 박종철이 체포되기 며칠 전 박종철의 하숙집을 찾아온 적이 있었고, 박종철에게 연락이 두절된 몇몇을 연결해줄 것을 부탁해놓은 상황이었다. 박종철이 만약 대공분실 고문경관의 고문에 굴복하여 이러한 사실을 털어놓았다면 목숨을 건질 수는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박종철은 혹독한 물고문에도 ‘선배와의 약속’을 끝내 발설하지 않았다. 그러한 사실을 발설하는 순간 당장 자신에 가해지고 있는 고문을 면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선배 박종운을 비롯한 또 다른 여러 운동가들이 연행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할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신의(信義)를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히 여겼던 박종철 열사는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폭압에 당당히 맞서다 끝내 민주주의 제단에 자신의 소중한 목숨을 바치고 만 것이다.

‘수많은 보통사람들’의 용기로 밝혀낸 죽음의 진실

사실 박종철의 의로운 죽음은 자칫 전두환 군사정권의 은폐공작으로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더라”라는 말로 상징되는 ‘단순 쇼크사’로 처리되어 그대로 묻히면서 수많은 의문사 사건의 하나로 남을 뻔했다.  

하지만 전두환 군사정권의 폭압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수많은 보통사람들’의 용기 덕에 고문에 의한 사망 사실을 밝혀냈고, 그 구체적인 과정에 대한 전두환 군사정권의 축소·은폐·조작 음모 역시 분쇄되었다.

영화 <1987>도 그러한 사실을 잘 묘사하고 있다. 시신을 화장 처리할 수 있도록 지휘해달라는 경찰의 요구에 대해 ‘시신보존명령서’에 사인을 하고 끝내 부검을 관철한 최환 공안부장, 박종철 열사가 물고문으로 사망한 직후 남영동대공분실에 불려가 검안을 담당한 후 기자를 만나 자신이 경험한 진실을 밝혔던 중대병원 의사 오연상, 돌아가는 윤전기를 멈추고 박종철 고문사 사건을 1월 15일자 석간에 최초로 보도한 중앙일보 기자 신성호, 구속된 고문 경관과 경찰 간부의 면회 과정에서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을 감옥에 있던 당시 민통련 사무처장 이부영에게 알려 두 명의 경관이 업무과욕 때문에 우발적으로 벌인 사건으로 축소·은폐·조작한 군사정권의 음모를 분쇄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영등포교도소 보안계장 안유, 고문에 가담한 경관이 셋 더 있다는 사실을 담은 이부영의 비둘기(편지)를 외부에 전달한 한재동 교도관과 이를 받아 김정남에게 전달한 전병용 전 교도관 등등. 

이러한 보통사람들의 용기와 헌신은 마침내 박종철 고문사 사건의 진실을 세상에 드러냈고, 온 국민의 분노를 자극하여 6월 민주항쟁에 떨쳐 일어나게 했던 것이다.  

✽ 1987년 박종철군 추도집회에 참여한 시위대가 박종철의 얼굴이 그려진 피켓을 들고 전경들과 대치하고 있다. (사진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박종철 열사의 무덤 옆에 자리 잡은 아버지 박정기와 어머니 정차순의 무덤

박종철의 의로운 죽음이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졌을 때, 박종철의 유가족과 여러 지인에게는 신의(信義)를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히 여겼던 박종철의 정신을 이어가야 한다는 과제가 주어졌다. 특히 박종철의 유가족에게는 그 과제 실현이 박종철을 가슴에 묻은 채 박종철의 삶을 대신 살아야 한다는 명백한 사명감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먼저 나선 이는 어머니 정차순과 누나 박은숙이었다. 어머니와 누나가 먼저 나선 것은 아버지 박정기는 공무원 신분이었고, 형 박종부는 회사원의 신분이었던 탓이 크다. 어머니 정차순과 누나 박은숙은 6월 민주항쟁의 역사 현장은 물론 이어진 대통령 선거에서도 박종철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뛰어다녔다.

아버지 박정기가 전면에 나선 것은 부산시 수도국 공무원 정년퇴임이 있었던 1987년 6월 30일 이후였다. 아버지 박정기가 유가협에서 활동을 시작한 것은 유가협이 창립된 지 1년 후에 열린 유가협 정기총회(1987. 8. 12)부터였다. 당시 회장은 이소선 어머니였고, 사무국장은 조인식 여사(박종만 열사 부인)였다. 이후 아버지 박정기는 유가협을 근거지로 하여 아들의 삶을 대신사는 민주화운동에 헌신하였다.

아버지 박정기가 아들 곁에 묻힌 것은 2018년 7월 28일에 돌아가시면서이다. 2024년 4월 17일에는 어머니 정차순이 돌아가시면서 아들 곁에 안장되었다. 아버지 어머니의 무덤과 박종철 열사의 무덤 사이에는 30여 년 만에 하늘에서 만나는 부모와 자식을 묘사한 비석이 세워져 있다. 

지금은 형 박종부가 유가협과 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를 근거지로 ‘박종철 정신’을 실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