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 이야기 ③
- 재야 민주화운동의 상징 문계백, 마석모란공원에 안장되다
김학규 추모연대 교육위원장
민주화운동가들은 1980년대 재야운동의 연합체인 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을 이끈 문익환(1918-1994), 계훈제(1921-1999), 백기완(1933-2021)을 문계백으로 불렀다. 세 사람의 성을 따서 한 사람인 양 부른 것이다. 문계백이 이끈 민통련은 전두환군사독재 시절인 1985년 3월 25개 재야 민주화운동 단체들이 연합하여 발족한 단체로 1987년의 5월에 야당까지 포괄하는 국본(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을 탄생시켜 6월 민주항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었고, 1989년 1월 전민련(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이 결성되면서 자신의 사명을 다하고 발전적으로 해소되었다.
모란통일동산에 안장된 문익환
문계백의 문에 해당하는 문익환 목사는 1970, 80년대 민주화운동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만주 용정에서 태어난 문익환은 윤동주 시인, 독립운동가 장준하 등과 친구이기도 했다. 해방과 함께 월남한 문익환은 수유리에 자리를 잡고 살았는데, 1994년 갑작스럽게 돌아가시면서 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되었다.
문익환 목사의 묘는 원래는 민족민주열사묘역 내 남쪽 자락에 자리 잡았고, 2021년에는 평생 동지 박용길 장로(1919-2011)도 돌아가시면서 함께 안장되었다. 그런 문익환·박용길의 묘가 북쪽면 자락으로 이장한 것은 2021년 9월이었다. 그보다 7개월 전에 돌아가시면서 이곳에 안장된 정경모(1924-2021)의 묘 옆이었다. 이때 이곳에는 다른 곳에 안장되어 있던 유원호(1930-2019)의 묘도 이장하였다. 1989년의 유명한 방북사건 관련자인 이들 방북 동지 3인방이 죽어서야 이렇게 모란통일동산에 다시 모이게 된 것이다.
이어 2022년 6월에는 시민참여기금을 조성하여 ‘통일의 씨앗’을 뿌린 이들이 모여 있는 묘역을 ‘모란통일동산’으로 명명하고 정비하는 사업을 벌였다.
‘통일의 씨앗’을 뿌린 1989년 문익환 일행의 방북과 합의
문익환 목사가 1989년 3월 정부 당국에 신고하지 않고 북한을 방문하여 북의 김일성 주석과 회담한 일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뚜렷이 남아 있다.
문익환은 이 회담에서 고려연방제 통일방안을 가지고 있던 김일성을 설득하여 본인이 주장하는 ‘연방제통일 3단계론’을 사실상 수용하도록 하는 성과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공동 발표문 4항에서 “남북 쌍방이 공존의 원칙에서 연방제 방식으로 통일하는 것이 우리 민족이 선택할 필연적 통일 방도이며 이는 한꺼번에 할 수도 있고 점차적으로 할 수도 있다.”고 하여 북이 ‘점차적으로 할 수도 있다’는 입장을 처음으로 수용했던 것이다. 이 합의는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간에 이루어진 ‘6·15 남북 공동선언’에 나오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라는 개념의 토대가 되었다.
문익환 일행의 방북과 남북합의는 정부의 통일논의 독점에 익숙해 있던 대중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고조시키는 구실도 했다. 불과 4년 전인 1985년에 국회의원 유성환이 국회에서 “대한민국의 국시는 반공이기보다는 차라리 통일이어야 한다.”고 한 발언조차 문제가 되어 국회의원직 상실과 감옥살이를 당해야 했던 나라에서 평화통일에 대한 대중적 열망이 표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겪으면서 그동안 금기시되어 왔던 통일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럼에도 노태우 정부는 이를 공안정국을 조성하는 빌미로 삼아 오히려 민주화운동 세력을 강하게 탄압했다.
문익환 목사의 방북에는 소설가 황석영, 재일 통일운동가 정경모, 그리고 유원호가 함께 했다. 소설가 황석영은 『장길산』 등으로 유명했고, 재일 통일운동가 정경모도 1970년부터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한국 사회의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앞장서온 인물이었다. 이에 비해 유원호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인물이었다.
유원호는 원래 방북 대열에 합류할 대상이 아니었다. 문 목사는 원래 아들 문호근을 데리고 가려고 했는데, 비자 문제가 생겨 다른 대안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서 급하게 유원호에게 부탁했는데, 유원호가 이에 기꺼이 응했다고 한다.
문익환 목사는 김일성 주석과는 두 차례에 걸쳐 회담을 하였고,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인 허담과도 회담을 가진 후 1989년 4월 2일 인민문화궁전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자주적 평화통일과 관련된 원칙적 문제 9개항’이란 제목의 ‘4·2 공동 선언’을 발표하였다. 합의 성명 형식으로 발표된 ‘4·2 공동 선언’은 ①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3대원칙에 기초한 통일문제 해결, ②정치·군사회담 진전을 통해 남북의 정치·군사적 대결상태 해소와 동시에 다방면의 교류·접촉 실현, ③연방제 방식의 통일, ④팀스피릿 훈련 반대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문익환 일행의 수난
소기의 성과를 거둔 문익환 일행은 원래 판문점으로 내려오려고 했다. 하지만 북에서 이를 수용하지 않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노선을 변경해야 했다. 민예총을 대표하여 방북했던 황석영은 북에 더 머물기로 했고, 문익환, 정경모, 유원호 등 3인은 중국의 베이징을 거쳐 도쿄로 왔다. 서울로 들어가면 곧바로 안기부에 연행될 것을 안 이들은 도쿄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방북 성과를 언론에 미리 알렸다. 일본에 망명 중이던 정경모는 도쿄에 남아 체포를 면했지만, 문익환과 유원호 2인은 김포공항에 들어오자마자 안기부에 체포되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
유원호는 1989년 7월 10일에 열린 2차 공판에서 “북한을 보는 시각과 가치판단에 따라 반국가단체인지의 여부를 다르게 인식할 수 있다”고 진술해 북한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 있는 국가보안법에 의문을 제기했다. 유원호는 8월 28일 열린 5차 공판의 변호인 반대신문에서는 “통일은 화해와 일치를 추구하는 한국 기독교의 당면과제이기 때문에 북한을 방문”했다는 취지로 자신의 방북 동기를 밝히기도 했다.
문익환과 유원호는 1심에서 징역 10년과 자격정지 10년을 선고받았고, 항소한 2심에서는 징역 7년에 자격정지 7년을 선고받았다. 문익환과 유원호는 4년의 감옥생활 끝에 1993년 사면으로 석방되었다. 문익환 목사 일행의 방북과 ‘4·2 공동선언’은 가까이는 노태우 정부가 1991년 12월 13일 북한과 ‘남북기본합의서’를 체결하도록 하는 데도 기여했고, 멀게는 2000년 김대중 당시 대통령과 김정일 당시 국방위원장이 함께 발표한 ‘6·15 남북공동선언’의 기반이 되었다고 평가된다.
한편, 문익환 목사 일행의 한 명이었던 정경모는 우리 사회가 민주화된 이후에도 ‘국가보안법 위반 기소중지자’라는 벽에 막혀 51년의 동안 귀국하지 못한 채 일본에서 살다가 결국 2021년 2월 일본에서 ‘마지막 망명객’으로 남은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정경모는 죽어서야 귀국할 수 있었고, 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되었던 것이다.
모란통일동산,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열망하는 이들의 꿈과 희망에 활력을 불어넣는 공간
모란통일동산 벽면에는 “백두에서 한라까지 조국은 하나다”라고 쓴 문익환 목사의 붓글씨가 새겨져 있다. 모란통일동산은 앞으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열망하는 이들의 꿈과 희망에 활력을 불어넣는 공간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된다.
(계훈제의 묘와 백기완의 묻엄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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